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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천(가명.오른쪽)씨와 고동민(가명)씨가 13일 오후 경기 안양에서 운영하는 붕어빵 노점을 정리하고 있다. 조씨는 이 노점에서 버는 돈으로 고씨의 운동 비용과 생활비를 지원하고 있다. 안양/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지난 13일 오후 ‘대붕 붕어빵’이라고 천막 간판을 단 포장마차 안에서 조씨가 붕어빵을 굽는 사이 조씨의 ‘사회 동생’인 고동민(가명·21)씨가 손님을 끌었다. “잘생긴 청년들이 만든 맛있는 대붕 세마리, 2천원입니다!” 지나가던 아주머니들이 발길을 멈추고 붕어빵 여섯개를 주문했다. “젊은 사람들이 열심히 사네.” 수줍음 많은 조씨는 소심하게 씩 웃고 만다.
소년원 출신 조병천·고동민씨
세상 나오자 일자리마다 퇴짜
청소년자립생활관 도움으로
붕어빵 장사 시작해 생계 꾸리며
고씨 격투기선수 꿈 이어가
“얼른 부모님 아픔 씻겨드리고파”
“열심히 일해 푸드트럭 샀으면”
사실 조씨와 고씨에게는 아픈 과거가 있다. 붕어빵 장사는 뒤틀렸던 청소년기를 바로잡고 성인으로서 떳떳한 삶을 살아보고자 하는 인생의 도전이다. 이들은 청소년 시절 소년원을 몇차례씩 드나들었다가 각각 2012년, 2017년 사회로 나왔다.
“술 먹고 친구들끼리 싸움하는 거 옆에서 보다가 그만….” 손님이 조금 뜸한 사이 조씨가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고 소년원을 다녀오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사람들을 잘 때렸어요. 저는 옆에서 지켜보는 편이었는데 그날은 애들이랑 잘못 엮여서….” 그 일 뒤로도 무면허 오토바이 운전 등이 적발되기도 했다. 조씨가 부끄러운 듯 한쪽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2009년 1월부터 소년원을 들락거리다 2012년 4월에야 사회로 나왔다.
소년원 신세까지 지게 되는 청소년들은 결손가정에서 자라는 경우가 많다. 가정폭력과 학대, 경제적 빈곤 등 다양한 이유로 가출을 하고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과 어울리며 비행을 저지르다가 결국 소년원 처분을 받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날 때부터 비행 ‘유전자’를 갖고 있던 게 아니다.
“형이 군대에서 백혈병에 걸려서 나왔어요. 재활치료 계속 받았는데 2008년 11월에 결국 죽었어요. 형 죽을 때 제가 학교에 가느라 옆에 못 있었어요.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데 제 옆엔 그런 친구들밖에 없었고 부모님도 힘들어하셔서 저한테 신경 못 쓰시고 그러다가 저도 모르게….”
그래도 조씨는 성실했다. 소년원에서 공부를 열심히 한 끝에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사회에 나오면 직장도 제대로 잡고 일을 해보려 했다. 하지만 사회의 시선은 차가웠다. “저는 서비스직이 적성에 맞는데 그런 곳에서는 저를 절대 채용하지 않았어요.”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수없이 봤지만 간단한 일자리조차 찾기 어려웠다고 한다.
고동민씨의 어린 시절도 뒤죽박죽 엉클어져 버렸다. 2012년 8월 술 먹고 시비가 붙은 일행들과 패싸움을 벌였다가 6개월 소년원 처분을 받았다. 2013년 3월 소년원에서 나온 뒤 또 술자리에서 누군가와 시비가 붙어 싸웠다. 술 먹다가 시비가 붙어 처벌받게 됐다. 2015년 1월 소년원에 다시 갔고 2017년 1월이 되어서야 나왔다.
“제가 사는 동네에는 깡패들이 많았어요. 힘센 아이가 돼야 또래에서 인정을 받았어요. 제가 애들을 때리면 사이코란 말을 들을 정도로 때렸는데 그게 오히려 내 존재를 인정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고씨는 운동에 소질이 있었다. 초등학교 때 축구선수로 뛰던 중 인대 부상을 심하게 입고 축구선수의 길을 포기하게 됐다. 꿈이 사라지니 학교도 잘 안 가게 되었고, 중학교 때는 결국 ‘싸움 잘하는 아이’란 소리를 듣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게 됐다. 넘치는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몰랐던 그는 계속 사고를 쳤다. 그러다 부모님이 엉엉 우는 모습을 봤을 때 정신이 번뜩 들었다고 했다.
“재판정에서 판사가 선고하기 직전에 아빠가 무릎을 꿇고 제발 선처해달라며 우셨어요. 아빠 그런 모습을 처음 봤어요. 제가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2년간 소년원 처분을 받았다. 소년원 생활은 “혀 깨물고 자살하고 싶을 만큼” 괴로웠지만, 고씨는 사회에 나가면 꼭 성공해 부모님께 안겨준 아픔을 씻겨드리겠다고 결심하며 버텼다고 한다.
조씨와 고씨가 각각 소년원을 나와 사회에서 친형제처럼 지내게 된 건 김기헌(38)씨와의 인연이 계기였다. 김씨는 법무부가 운영 중인 경기청소년자립생활관의 생활지도실장이다. 청소년자립생활관은 소년원에서 나온 청년들이 사회에 온전히 정착하기 전 숙소 등 이런저런 지원을 받는 곳이다. 김 실장은 조씨에게 붕어빵 장사를 권했다. 고씨에게는 격투기선수가 될 수 있는 훈련을 권했다. 김 실장은 직접 붕어빵 만드는 법을 배워 조씨에게 전수했다. 체육대학을 나온 김 실장은 고씨가 다닐 체육관을 직접 알아봐주었고 함께 운동을 시작했다.
“사실 저도 소년원 출신이거든요. 열일곱살 때 친구를 때려서요. 그래서 저는 소년원 출신 아이들이 무슨 고민을 하면서 사는지 잘 알아요. 청소년 때 벌인 실수를 성인이 되어서도 반복하지 않으려면 온전히 자립할 때까지 주변과 국가에서 도움을 줘야 해요.”
자립생활관에서 함께 생활하는 조병천(가명.오른쪽)씨와 고동민(가명)씨가 13일 오후 경기 안양에서 운영하는 붕어빵 노점을 정리하고 있다. 신씨는 이 노점에서 버는 돈으로 김씨의 운동 비용과 생활비를 지원하고 있다. 안양/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체육관 회비랑 각종 운동용품 사고, 시합에 나가려면 참가비도 내야 하고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어요. 제가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해서 100만원 정도는 버는데 생활비는 150만원을 써요. 형(조병천)도 형편이 어려운데 저를 많이 도와줘요. 정말 고마워서라도 열심히 운동해서 꼭 성공하고 싶어요.”
김 실장은 안양 지역 소년원 출신들을 모아 스포츠팀 ‘에스앤지’(S&G)를 꾸렸다. 그들의 넘치는 힘을 사회에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풀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지역의 교회와 비영리 단체 등이 후원에 참여했다. 운동하는 동생, 고씨의 목표는 뚜렷하다. “로드 에프시(FC) 장익환 선수처럼 되고 싶어요. 그분은 대기업 다니다가 때려치우고 전업하신 분이거든요. 저도 유소년 축구선수 하다가 격투기로 전향한 건데 장익환 선수처럼 성공하고 싶어요.”
붕어빵 굽는 형의 각오도 만만찮다. “저도 열심히 일해서 1년 안에 500만원을 모아 푸드트럭을 사는 게 꿈이에요. 동민이 대회 출전하는 곳마다 푸드트럭 몰고 가서 사람들 밥도 해주고 장사도 열심히 할 거예요. 동민이가 잘되는 거 보면 이상하게 제가 돈을 버는 느낌이 들고 힘이 나요.”
재단법인 ‘함께일하는재단’은 우리 사회의 도움을 조금만 받으면 자립에 성공할 수 있는 다소 어려운 처지의 성인들을 돕고 있다. 조병천·고동민씨는 붕어빵만큼 부푼 가슴을 안고 우리 사회에 희망의 발길을 내딛는 중이다. 따뜻한 온기를 품은 붕어빵이 제 몸을 키워가는 만큼 청년들의 꿈도 커질 수 있을까.